세상을 바꾼 알파걸들 - 못다 핀 꽃,역사 속 알파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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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알파걸들 - 못다 핀 꽃,역사 속 알파걸을
  • 한경리크루트
  • 승인 2009.04.09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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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세상을 바꾼 알파걸들
못다 핀 꽃,
역사 속 알파걸을 찾아서


남성중심의 정치와 제도, 관습과 문화!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뛰어난 지식과 남다른 지혜, 눈부신 미모 등 다방면에서 우 수한 자질을 지닌 여성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 고 그들은 ‘여자이기 때문에’ 묻혀졌고 인정받지 못했고 손가락질 당해 야만 했다. 황무지 속에서 꽃망울을 틔웠지만 시대를 앞서간 까닭에 제대 로 펴보지도 못한 채 잊혀져 간 역사 속 알파걸들. 파란만장했지만 누구보 다 뜨겁게 살다간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의 오늘을 반성하고, 내일 을 새롭게 꿈꿔보자.

대원제국을 호령한 고려의 여인 기황후

원나라가 요구한 고려의 공녀로 원의 황실에 들어간 여인이 있었다. 그녀 는 한국여성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중원의 국모가 되었으니, 그가 바 로 진주 강씨인 기황후다. 1333년 충숙왕 복위 2년에 고려 출신의 내시 고 용보의 추천으로 황실에 들어간 그녀는 지금의 북경인 원나라 대도에서 황 제인 순제의 차를 올리는 궁녀가 되었다. 하지만 공녀라는 참담한 현실에 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그 기회를 이용해 낯선 이국땅에서 야망을 꽃피웠 다.

황후가 되기까지 온갖 냉대와 행패를 묵묵히 참아낸 기황후는 황후로 책봉 된 뒤 고려를 위해 권력을 발휘한다. 그녀는 충렬왕 이후 80여 년 동안이 나 계속되던 공녀징발을 금지하고 환관의 징발 또한 대폭 축소시켰다. 뿐 만 아니라 고려를 원에 속한 하나의 성으로 만들자는 입성론 논의를 폐지 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기황후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자료도 남아있지 않다. 뿐만 아 니라 우리 민족의 뇌리에 그녀는 부정적으로 각인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오빠 등 친인척이 고려사의 반역조에 올라 있을 정도로 평판이 나 빴기 때문이다.

최초의 여성 CEO 김만덕(1739~1812)

조선시대 제주의 거상 김만덕, 그녀를 일컬어 사람들은 ‘최초의 여성 CEO’, ‘최초의 여성 기부자’라고 말한다. 그녀는 조선 영조 때인 1739 년, 북제주군의 어느 상인의 딸로 태어났는데 일찍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다. 친척 집에서 겨우 목숨을 이어가던 만덕은 나이든 기녀의 집에 의탁했 다. 그러나 어른이 된 만덕은 기녀가 천시받는 직업임을 알게 되어, 제주 목사 신광익에게 탄원해 양인(良人)으로 환원됐다. 양인이 된 만덕은 객주 (客主)를 차려 자신만의 차별화된 전략으로 돈을 많이 벌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편안하게 사는 것은 하늘의 은덕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검소 하게 살았다.

1793년 제주도에서는 세 고을에서만 600여 명이나 아사할 정도로 심각한 흉년이 계속되자 만덕은 자신의 전 재산을 풀어 구호식량으로 기부해 굶주 림으로 죽어가던 제주도 민중들을 구원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의녀(義女) 만덕을 알현한 정조가 제주목사 이우현을 통해 만덕의 소원을 물어보는데, 만덕은 한양에서 임금님을 뵙고, 금강산을 보고 싶다고 하였 다. 대답을 들은 정조는 “관의 허락 없이 제주도민은 섬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라는 규칙을 깨고 만덕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또한 내의원 의녀반 수 벼슬을 제수하여 그녀의 선행에 대한 보답을 했다.

여성 의병대장 윤희순(1860~1935)

조선조 말기에 시아버지, 남편, 아들 3대에 걸친 의병 활동을 뒷바라지하 며 오직 나라를 사랑하고 지키려는 마음으로 살아온 여인이 있었으니 바 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병대장 윤희순이다. 그는 16세 되던 1876년 춘 천 의병장 외당(畏堂) 유홍석(柳弘錫)의 장남 유제원(柳濟遠)과 결혼했 고, 시아버지 유홍석의 영향으로 의병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일본이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발표할 무렵 그녀는 ‘안사 람 의병가’ 등 여러 노래를 지어 항일의식을 불러일으켰고, 여성들도 구 국 활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1907년 일제가 고종황제를 폐 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자 의사는 군자금을 모아 가정리 여의내 골에서 놋쇠와 구리를 구입하고 탄환, 유황 등으로 화승총에 쓸 화약을 직 접 제작·공급하는 탄약제조소를 운영했다. 76세의 나이로 치열한 삶을 마 감할 때까지 그녀의 애국활동은 계속 되었는데 여성의 몸으로 나라를 위 해 열정을 불사른 그녀야 말로 ‘세기의 여걸’이 아닐까.

개화기의 위풍당당 신여성 하란사(1875~1919)

대한민국 여성 최초로 미국에서 학사학위를 따 낸 하란사는 오랜 관습과 전통을 깨고 여성해방을 몸으로 보여준 개화기의 당당한 신여성이었다. 일 찍이 정부 관리의 후처로 들어간 그녀는 신교육을 받기 위해 이화학당에 지원한다. 하지만 학교 측에서 기혼 여성자라는 이유로 두 번이나 거절하 자 당시 이화학당 학장이었던 프라이(L.E. Frey)를 밤중에 찾아가 설득하 는 담대함과 열정을 보인다. 졸업 후에는 일본 유학을 거쳐 미국 오하이 오 주의 리언 대학에 입학, 1906년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학 사 학위를 받는다. 귀국 후 학당의 학감으로 봉직하면서 기독정신의 보급 과 함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한편,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 그녀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은둔 중에 있 던 고종의 밀지를 받아 1919년 6월 파리강화회담에 의친왕(義親王)을 파송 할 비밀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고종의 승하로 실패하자 중국 베이징(北 京)으로 건너가게 되는데 그곳 교포들이 마련한 환영 만찬회에서 식중독으 로 사망했다.

사랑하는 남자와 현해탄에 몸을 던진 윤심덕(1897~1926)

우리나라 최초의 국비유학생, 최초의 여류성악가, 최초의 대중 가수, 당 대 최다 음반판매량 보유가수, 방송국 사회자 윤심덕! 그녀는 키가 크고 목이 긴 서구형 외모에 자신감이 넘치는 성격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 다. 그녀는 도쿄 음악학교 최초의 조선인 학생으로 유학생활을 하다가 극 작가 김우진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는 부인과 자녀가 있는 유부 남이었다. 결국 그녀는 그녀의 나이 서른 살, 파란만장한 삶을 뒤로하고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진다. 너무도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그 끝 은 너무도 허무했던 아까운 청춘이었다.





[월간 리크루트 20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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