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모닝커피’는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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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모닝커피’는 어땠을까?
  • 한경리크루트
  • 승인 2017.02.24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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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의‘모닝커피’는 어땠을까?

1970년대 한국의 일부 시골지역에서 커피를 보약처럼 중요시했다는 자료가 있다. 다양한 만남에서 커피는 주요 매개 수단이었다. 전통적인 사랑방은 다방으로 발전하였고, 다방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 현재의 현대적인 모습으로 자리잡았다. 많은 사람들은 왜 커피에 매료되었을까? 아니, 매료의 수준을 넘어 왜 중독 수준에 가깝게 마시게 되었을까?

우리나라 한식과는 어울리지 않는 커피. 한국은 어떻게 세계에서 커피소비량 6위가 되었을까? 그 이유는 커피가 서구화의 상징이고, 한국인 사교행위의 주요 매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지극한 커피사랑은‘모닝커피’라는 장르를 탄생시켰다. 오늘날의 모닝커피는 주로 아침에 자고 일어난 뒤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마신다. 하지만 과거의 모닝커피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에 날계란 노른자 하나를 풀어, 그 위에 참기름 한두 방울 떨어뜨려 휘휘 저어 마시는 걸 의미했다.
또한 1970년대까지 모든 다방의 고정메뉴는 계란반숙이었다. 계란반숙을 곁들인 모닝커피는 아침을 먹지 못한 손님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아침손님이 차지하는 매출이 커지자 이웃 다방들은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어떤 다방은 10시, 어떤 다방은 11시, 심지어 24시간 내내 모닝커피를 서비스하는 다방까지 생겨났다. 예전에는 중·고등학생이 다방 출입을 했다가 선생님에게 들키면 19금 성인용 영화를 보다 걸린 것 이상의 엄벌을 감수해야 했다.

당시 학생 신분으로서‘다방출입 절대 불가’에 한이(?) 맺혔다고 우스개 소리를 한 김홍신 작가의 증언이다. “어른들이 드나드는 다방에서 내가 처음 커피를 마신 것은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그 시절에는 고교생이 다방을 출입하는 게 금기시되었다. 어느 일요일, 성당에서 미사참례를 한 뒤에 나는 누나를 따라 다방에 들어섰다. 어른들이 기이한 눈초리로 나를 훑어보았지만 누나는 개의치 않았다. 면 소재지의 허름한 다방에 도시처녀 티가 나는 세련된 여성과 함께 들어선 까까머리 고교생, 그것도 교복을 입은 채 당당하게 자리에 앉아 누나가 시켜준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 그곳에 있던 어른들에겐 매우 눈에 거슬리는 일이기도 했으리라. 마침내 한 중년 사내가 시비조로 말을 걸었다. 학생이 다방 출입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공박이었다.


누나는 사내를 올려다보며 촌스럽게 굴지 말라는 듯 묘한 시선을 보냈다. 그건 마치 도시에서는 학생도 커피를 마시고 다방 출입을해도 아무 상관없다는 암시를 주는 듯했다. 더구나 성인을 대동하고 커피 마시는 건 괜찮은 걸 왜 모르냐는 의젓한 시늉이기도 했다. 다방 아가씨는 오히려 까까머리 고교생을 데리고 들어와 커피를 시킨 처녀의 도시적 우월감을 인정하듯 중년 사내를 말렸다. 우리는 그 다방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셨고 나는 얼른 대학생이되어 분위기 있는 찻집에서 눈치 안 보고 커피 마실 꿈을 그려보았다.”

커피 생산의 합법화로 1969년 당시 다방은 5천여 개나 되었다고 한다. 새 고층건물이 들어서면 최신식 시설과 함께 들어서는 것이 다방이었다고 하니 지금과 비슷하다. 미국 뉴욕에서‘계란 노른자를 파는 남자’로 유명한 한 청년이 화제다. 하루 평균 300여 명이 그의 다방을 찾으며‘계란 노른자를 넣은 다방 커피도 고소한 라테 맛이라며 뉴요커들도 좋아한다’고 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 한국의 커피문화 전파는 지금부터가 시작이 아닐까?

김수진 교수 백석예술대학교 커피바리스타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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