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찾아온 기적같은 두 번째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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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찾아온 기적같은 두 번째 도약
  • 한경리크루트
  • 승인 2019.07.24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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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상 조리사/호주 (제공:한국산업인력공단)

더 넓은 세상으로, 요리사의 꿈을 꾸다

윤상아, 미안하다. 아버지가 능력이 부족해서 미국에 돌아가기 힘들 것 같다.”

군대를 다녀온 이후에는 집안이 더 나아져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미국에 있는 대학에 휴학계를 내고 입대를 결정했다. 하지만, 군대를 전역하고 나서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우리 집에 남은 것은 어마어마한 이자와 몇 억이라는 빚이었고, 그것은 우리 가족의 목을 옥죄고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힘겹게 그리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저 말을 나한테 할 때에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속이 쓰라리셨으리라...

그렇게 눈물을 머금고 쓰라린 마음으로 유학의 길을 접고 빚을 갚기 위해 몇 년을 학원 강사와 영어 과외 선생으로 일했다. 다행스럽게 아버지의 일이 풀려 빚은 다 갚았지만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친구들을 통해서 유학생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메리트는 많이 무디어진 걸 듣고 지켜봐왔기 때문에 무리를 하면서까지 다시 유학의 길에 오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다시 나의 길을 찾아야 했다, 편입 준비해서 대학교를 들어간다 하더라도 졸업하면 30대 초반. 졸업 후에 아무 스펙도 없는 내가 어떠한 미래를 살게 될지는 정확하게 잘 모르더라도 얼추 예상은 가능했다. 늦었지만 그래도 체력이라도 좋은 내가 좋아하고 오래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많은 고민 끝에, 유학생활을 하면서 향수병에 걸려 고생하던 친구들에게 위로가 되고자 미숙하게나마 요리를 해서 그들에게 기쁨을 주고 보람을 느끼던 추억이 심장에 큰 울림을 주었다.

긴 상의 끝에 부모님은 마지못해 요리를 나에게 허락하셨다. 늦게나마 전문학교에서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부모님은 어떻게 하든 나의 최대 강점 중 하나인 영어를 활용하길 원하셨다. 나도 영어는 썩히고 싶지 않았기에 어떻게 하면 일하면서 영어를 요리와 엮을 수 있을까?’라고 고민을 했고, 가능하다면 해외에 나가서 요리사로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허락하지 않았고 아무 준비도, 연줄도 없이 해외에 나가서 일을 한다는 것은 오히려 나에게 실이 될 가능성이 컸기에 무작정 나가기에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졸업생들을 위한 취업박람회가 조그마하게 학교 강당에서 개최되었다. 별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참석하면 여러 회사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나마 습득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참석을 했다.

국비 프로그램 지원자 중 한 명으로 발탁되다

취업박람회에서 나는 국비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되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프로그램이라 조금은 의아했지만, 프레젠테이션을 들으면서 가슴이 두근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기초를 다지는 영어수업부터 시작해 짧은 시간 내에 호주에서 요리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고 취업까지 알선해 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 프로그램을 어마어마하게 저렴한 비용으로 받을 수 있었기에 나에게는 다시없을 기회 같았다. 그래서 더더욱 그 기회를 붙잡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거의 매일 회사에 찾아가서 얼굴 도장을 찍었고 대화를 통해서 궁금한 점들도 알아갔다. 그리고 내가 가진 강점과 열정을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으로 어필했다.

영어시험, 면접 등 4번의 엄정한 심사가 있었지만 그 기간 동안 만큼은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준비한다는 마음으로, 그리고 국민의 세금을 지원받아 가는 만큼 스스로 만전의 준비와 다짐을 했고, 최종 선발될 때까지는 그만큼 긴장과 기대 속에 살았다. 그리고 드디어, 수많은 지원자 가운데 한 명으로 발탁되었다는 축하 소식이 전해졌다. 나는 얼마나 기뻐했던지 모른다. 최종 선발 후 프로그램이 시작되었고 나를 비롯한 14명의 선발된 친구들은 거의 한 식구처럼 생활하면서 3개월간의 스파르타식 영어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강행군의 연수 과정에서 많이 배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 9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캐나다에서 오신 백인 선생님과 함께 정규 영어수업부터 개인 자습까지 같이 공부를 했다. 개인적으로 미국 대학교에서 영어로 수업까지 들었던 적이 있었던 터라 나의 경우는 1달에서 1달 반 만에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영어 수업은 딱히 어려운 점은 없었으나, 영어를 제대로 접하고 공부할 기회가 없었던 다른 친구들은 매우 힘들어했다.

3개월 만에 IELTS 5.5 수준의 영어 실력을 만들어 시험 통과를 해야만 호주로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다들 괴로워하면서도 죽기 살기로 영어에 목숨을 걸었다. 단순히 문법이나 점수를 잘 받기 위한 전략적 영어가 아닌, 읽기, 듣기, 쓰기, 말하기 네 부분에서 골고루 잘 해야 했기에 그만큼 쫓기고 괴로운 시간이었지만, 모든 친구들은 목숨을 걸다시피 하여 공부했기 때문에 영어 실력이 하루 하루 눈에 띄게 성장하였다.

나는 14명의 학생 중 제일 나이가 많았고 유학을 경험했었기 때문에 같은 팀, 같은 가족이라는 마음으로 옆에서 조언도 하고 도와주며 다독여주었다. 모두 그렇게 노력한 결과 영어의 기초도 없었던 친구들이 3개월 동안 모두 IELTS 5.5에 준하는 수준의 점수를 받았다. 그때 어마어마한 성장한 친구들을 보며 엄청 놀라기도 했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모든 영어 수업 과정을 마치고 호주로 떠나던 날, 부모님께 아들 호주가서 제2의 삶을 살기 위해 열심히 할 테니까, 이제 미국에서 대학 졸업 못 시킨 것에 대해서 다 털어버리세요. 나중에 제가 부를 때 오셔야 하니 건강 잘 챙기세요라고 안아드리고 그렇게 집을 떠났다. 부모님의 인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했어야 했기에 호주 가서 더 잘하자라는 다짐을 하고 20대 초반에 유학길에 올랐던 마음가짐보다는 더욱더 진중한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라 호주로 향했다.

호주라고 하면 캥거루, 코알라 밖에 몰랐던 나는 프로그램이 시작되고 여러 가지 정보를 습득하며 호주가 관광지로서, 요리로서 매우 유명한 곳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TAFE에서 수업을 시작하면서 한국보다 더 체계적으로 다방면에서 요리를 가르치고 접근하는지 알 수 있었다. 우선 크기가 넓은 강의실과 다양한 장비들, 그리고 한국에서는 큰 업장에서만 볼 수 있는 Walk-in 냉장고까지 있었고, 한 테이블에 2명씩 사용할 수 있는데 각 테이블에 큰 오븐 한 개, 수납형 냉장고 한 개, 도마도 색깔별로 각각 2개씩 있어서 각 재료에 맞는 도마를 사용하여 교차 오염을 방지하고자 했고 테이블 자체가 엄청 넓어 편하게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한 반에 최대 16명을 넘어가지 않으니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더욱 자세하게 효율적으로 가르쳐 줄 수 있었다. TAFE가 단순히 호주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운영하는 직업학교라 시설이라든가 교육의 질 자체가 William AnglissLe Cordon Bleu 같은 사설 학교보다 낮을 거라 예상했으나, 후에 방금 전에 언급한 직업학교 출신들이랑 이야기를 나눠봤고 사진도 보았지만 여러 가지 방면에서 사설 학교에 비교해 꿀릴 것이 전혀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한국에서 다녔던 직업전문학교에서는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음식들을 양식으로 통일해서 한 수업에 훑듯이 조금은 중구난방처럼 배웠는데, 이곳에서는 소스 만드는 데 몇 주가 걸렸고, 소스가 끝나면 다른 것 만들기에 집중했기 때문에 기본을 다지고 개념을 잡기에 엄청 좋았다. 그리고 호주가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뿌리가 나왔지만, 아시아와 근접해 있기에 요리에 대한 해석이 미국이나 캐나다와 달리 다양하고 더 개방적이라 TAFE에서 근무하시는 교수님들이 전부다 웍을 그럴싸하게 돌리시거나 아시아 쪽 재료와 음식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론을 다 가지고 계셨다. 나는 그 점이 매우 신기했다.

우리가 참여했던 Certificate IV in Commercial Cookery 코스는 17주 프로그램이었기에 많은 것들을 짧은 시간 내에 습득해야 했고, 또 스케줄 또한 쉽지 않았다. 아침 9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수업이 있는 날도 많았고 토요일에도 이론 수업이 매주 있었기에 강행군에 다들 힘들어 하면서도 새롭게 배우는 것들에 대해 매우 열심이었다. 또한 매주 화, 수요일에는 학교에서 브리즈번에 있는 유명 호텔들과 연결해 주어 모두가 인턴십을 나갔는데, 그곳에서 일하면서 호주에서는 주방에서 어떻게 일을 하는지, 재료들을 어떻게 조리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또한 그곳의 높은 직책에 있는 셰프들이 많은 노하우들을 알려주고 습득할 수 있게 성심성의껏 도와주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수업이 끝날 때 쯤, 우리가 수업에서 배워왔던 지식들을 기초로 하여 지나가는 손님들을 대상으로 팝업키친을 열었는데, 팝업키친을 열 때마다 돌아가며 Commis Chef부터 Executive Chef까지 역할을 돌아가면서 하여 각 포지션의 역할이나 책임이 무엇인지 대략이나마 알 수 있었다.

특히 Executive Chef 같은 경우는 그날의 이익과 손익분기점, 피드백 등등을 계산하고 고려하는 포지션이었는데, 첫 실습이고 교수님들이 옆에서 많이 도와주셨지만, Executive Chef의 포지션이 주는 압박과 무게가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단순히 맛있는 요리를 손님에게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맛있는 요리를 어떻게 잘 팔고 또 레스토랑을 어떻게 성장시킬 것인가까지도 요리사가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교양임을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세계적인 레스토랑에서 일하게 되다

그렇게 수업을 무사히 다 수료하고 나를 포함한 14명의 친구들은 각자의 계획을 가지고 호주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세컨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 몇 달간 농장에서 일을 한 뒤, 살기 좋은 도시이며 음식으로 유명한 멜버른으로 넘어갔다. 양식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던 나는 취득한 자격증과 IELTS 점수로 여러 군데 이력서를 돌렸고, 2016년도에 Top100 Restaurant에서 56위를 받은 Vue de Monde에서 연락을 받았다.

Trial이 끝나고 Head sous chef가 일자리를 제의할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아무 경력도 없는 내가 과연 세계적인 레스토랑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중요한 기회였고 다시 한 번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 국비 프로그램에 대해 정말 감사하게 생각했다.

일하는 곳은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다가 오픈 주방이다 보니 일반 레스토랑보다 일의 강도가 매우 세고 고되었다. 청결, 음식의 퀄리티, 일의 능률 등 신경을 써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고된 만큼 배운 것도 많았다. 다들 자부심이 넘쳤고, 최고의 요리사로 성장하기 위해서 각자가 가진 열정들은 나에게도 많은 자극이 되었다. 다들 번거롭지만 엄중한 기준들을 지키고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은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을 그만두긴 하였지만, 정말로 많은 것들을 배우고 느낄 수 있는 기회였고 이 경험을 계기로 내 스스로가 더욱 더 채찍질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은 다른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경력도 없는 내가 주 50시간만 일하면서 월급을 300만 원 이상씩 받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국비 프로그램이라 생각한다. 나는 과연 내가 국비 프로그램의 도움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라고 가끔 되물어보곤 한다. 혹시나 국비 프로그램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의구심을 갖지 말고 꼭 지원하여 더 좋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발판으로 삼기를 진심으로 추천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좋은 기회를 주신 제이엠피코리아와 산업인력공단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는 바이다.

<제공: 한국산업인력공단 월드잡플러스(www.worldjob.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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