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네 삶은 누구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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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네 삶은 누구의 것인가?
  • 한경리크루트
  • 승인 2022.04.26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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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화 박사의 대중문화 칼럼 / 문화기호읽기 2
노진화 박사(밸류커뮤니케이션 대표)

카프카 변신은 외판원 그레고리 잠자가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벌레로 변신한 이야기다. 꿈일까, 악몽일까. 작가는 꿈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잠자는 그동안 가족을 부양하고 부모가 진 빚을 대신 갚기 위해 열심히 일해 왔다. 그날도 출장 기차를 꼭 타야만 했다. 그러나 곤충이 되어버린 그의 모습은 끔찍하다. 더 이상 사회활동도, 가족에게 경제적 가치도 제공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벌레는 위협적인 동물이다. 지배인은 뒷걸음을 쳤고, 아버지는 급기야 사과를 던져 몸에 큰 상처를 낸다. 엄마는 아들을 대면할 용기가 없다. 누이는 그를 내보내자고 한다. “이게 오빠라는 생각을 버리셔야 해요그는 사물화되었고 아무 데도 쓸모없는 벌레다. 잠자는 닫힌 방 한 켠, 평화로운 숙고의 상태에서 숨을 거둔다. 가족은 잠자의 죽음에 애도와 슬픔을 느끼기는커녕, 전차를 타고 교외로 나간다. 새로운 세계를 희망하며 새로운 꿈을 확증한다.

그림 1. 클로드 모네, 1877, 생 라자르역 오르세미술관

산업사회와 소외된 인간

카프카 변신벌레라는 낯선 생소화 기법을 통해 자본주의 속에서 고립되어 가는 개인의 실종을 해명한다. 또한 가족과 사회 속에서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타산적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당시 19세기 유럽 사회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쳐 종교적 속박과 봉건제의 절대 군주사회로부터 해방되었다. 산업화와 기술의 발달은 물질의 풍요함을 가지고 왔다. 이면에는 인간성 상실과 소외가 나타나 사회 구조적 문제가 대두되었다. 헤겔은 타인으로부터의 소외, 세계로부터의 소외,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는 정체성과 소속감을 완전히 잃어버린 총아적 형태라고 말한다.

벌레가 되어버린 변신의 잠자는 인간-비인간, 가족-비가족, 정상-비정상이라는 대립적 존재와 모순 사이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했다. 작가 카프카도 그렇다. 체코의 주류 계층으로 진입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았지만, 유대인-이방인이라는 이질적인 요소의 결합으로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했다.

랠프 엘리슨의 장편소설 보이지 않는 인간에서 흑인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보이지 않는 인간이다내가 보이지 않는 건 다름이 아니라 사람들이 한사코 나를 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인종 편견의 불가시성 때문일까. 소설에서 주인공은 이름조차 없다.

 

소설의 모티브 정체성

인류 문명 이래 최대의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는 생물학적 시간의 연속성’, 소속이라는 공간성에서 존재론적, 인식론적 자아정체성을 가진다. 나는 ~이고 ~이다. 잠자는 벌레가 되면서 자기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나의 양친 때문에 참고 있으나. 그렇지 않았더라면 오래전에 벌써 그만두었을 것이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벽에 걸린 여인 사진이 전부였다.

사르트르는 의식이 자기 자신과 일치하여 라는 존재성을 확보하는 것이 존재의 최종 목표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태어나자마자 우리라는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감정을 억압한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있다. ‘우리의 시대에서 나의 가치를 중시하는 개인의 시대를 살고 있다. 개인주의는 다른 사람의 가치도 존중하며 책임질 줄도 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이기주의와 다르다.

자기정체성을 찾으려는 인간 본능은 최근 대중문화 부캐 놀이에 반영되고 있다. 부캐는 내 안에 또 다른 정체성을 표현하는 신조어다. MBC <놀면 뭐하니>, CJ 엠넷 <부캐선발대회>, TV조선 <부캐전성시대> 등의 프로그램은 새로운 세계관을 구축하고, 버츄얼 아바타로 활동한다. 직장인들도 자기만족과 미래의 삶을 고민하며 부캐를 만들어내고 있다.

가상과 현실의 부캐는 맞닿아 있다. 아들러는 인간의 몸은 마음과 더는 분리될 수 없는 전체이자 하나라고 말한다. 가상과 현실, ‘스마트에 길들여진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다른 모습으로 사는 것 같지만 결국 는 한 명이다.

 

죽어야 다시 사는 삶

잠자의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대부분의 종교에서 죽음은 새로운 생명을 상징한다. 고대인들은 영혼불멸설을 믿었다. 기독교는 부활 신앙이다. 내 안의 내가 죽고 거듭나면 새로운 영으로 태어날 수 있다. 불교는 윤회를 말한다. 윤회는 해탈을 통해 멈출 수 있다. 도교는 혼백을 말한다. 죽음 뒤에는 모든 것이 흩어진다. 유교는 불멸하지 않고 기로 순환된다. 누구도 죽음 이후 시간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죽음은 타자로부터, 연옥의 상상과 상징들로 내면화될 뿐이다.

로마의 성당 곳곳에는 성자들의 초상화들이 걸려 있다. 그들은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 이전의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선택했다. 잠자의 죽음도 타인으로부터의 자유, 권위에 억압되지 않겠다는 자기를 향한 열망을 스스로 승화하였을지도 모른다. 과거의 내가 죽어야 현재의 내가 새롭게 사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지금도 인간은 물화로 소비된다. 무한한 를 한 줄 스펙에 담을 수 없다. 미래는 어떨까. 디지털 불멸, 마인드 업로딩과 뇌지도, 일론 머스트 <뉴럴링크>와 넷플릭스 <블랙미러>의 칩, 영화 <공각기동대>에서 언급되는 전뇌화된 인격은 인간에게 점점 탈 인격성을 부여하고 자주적 삶을 가로막는다.

시대를 넘어 정체성 딜레마를 극복하려면 경쟁이 아닌 존재가치로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존재가치는 나를 어떤 사람이라 느끼는 확신, 실존을 인식하는 개념이다. 끊임없이 목표와 성공을 추구하는 경쟁 차원을 넘어선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 하는 것은 내 선택이다. 타인의 믿음으로 만들어진 세계는 내 것이 아니다.

어느 날, MBC 전 앵커 최일구 씨는 종이 하나를 꺼내더니 힘껏 바닥에 내리치고 밟았다. “나는 구겨지고 짓밟혀도 나의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10만 원 수표도 마찬가지다. 구겨진다고 해서 돈의 가치를 잃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특별한 존재 가치와 고유성,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아우라를 가졌다. 내가 가치 있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WHY’라는 질문에 익숙해져야 한다. 또한 에 관한 한 부조리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결단, 정체성의 실천이 필요하다. 그것은 타인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잠자의 가족은 그가 죽은 후에야, 각자 삶을 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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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화 박사는…

밸류커뮤니케이션 대표(現)

인하대학교 인터랙티브콘텐츠 &인지기호 LAB 연구원

(전) 한국인터넷진흥원 비즈니스 평가위원

(전) 한국우편사업진흥원 심사위원

(전) 송파구청 자문위원

realrojin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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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인 2022-04-27 07:23:06
컬럼을 읽으면서 생각없이 살아왔던 삶을 되돌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질문을 갖게되었고 어떻게 살것인지를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좋은 컬럼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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