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생 직업병 ‘피터팬 신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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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생 직업병 ‘피터팬 신드롬’
  • 한경리크루트
  • 승인 2003.05.17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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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REPORT II : 흔들리는 30대의 선택 ‘고 시’


고시생 직업병 ‘피터팬 신드롬’


‘사시’특별시 ‘법’구 ‘행정’동 ‘외’번지 신림9동 고시촌 고시거리. 봄을 재촉하는 비가 녹두거리를 촉촉이 적신 오후, 이곳 괴물(?)들은 우산도 쓰지 않은 채 삼삼오오 짝을 이뤄 고시원을 향하고 있다. 어쩌면 그렇게 약속이라도 한 듯 무표정한 표정에 스웨트 복(sweat wear)을 입은 이들은 저마다 두꺼운 책을 든 채 ‘건들지 마’라는 무언의 말을 이구동성으로 하고 있는 듯 했다.

학창시절 1등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녔을 이들은 마치 100미터 달리기 하듯 신림9동 ‘고시거리’에서 사회생활과 유리된 채 터줏대감으로서 자리 잡고 있다. 취업문이 좁고 막상 공부한 것에 비해 기회도, 대가도 기대하기 힘든 점을 고려하면 이들의 선택엔 어느 정도 인지상정을 느낄 수 있는 대목.


‘닭이 먼저, 달걀이 먼저’
하지만 문제는 이들이 기약 없는 ‘패스’를 놓고 오랫동안 사회생활과 차단된다는 점이다. 수년에서 수십 년이 걸릴 수 있는 게 바로 고시. 일부에선 고시의 도전을 ‘사회생활 도피성’ 공부라며 미간을 찌푸리는 사람들도 있다.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도 이 같은 현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이들 역시 외부에서 바라보는 부정적이고 왜곡된 시각에 불만을 토로한다.

K고시원 현관.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김모씨는 부슬부슬 내리고 있는 녹두거리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뿜는다. “고시촌이 패닉촌입니까?”라는 질문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김모씨는 심각한 분위기였다.
그는 “학교나 고향친구들이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직장과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부럽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급해진다”며 “하지만 지금까지 시간과 돈을 투자한 것을 생각하면 고시에서 손을 놓을 수는 없다”고 읍소했다.

M고시원 이모씨는 외부에서 바라보는 고시촌의 왜곡된 시각에 일침을 놓았다. 그는 “우릴 있는 그대로 봐 달라”며 “우리는 사회에서 격리된 것이 아니라 보다 성숙된 상위 개념의 사회봉사를 하기 위해 젊은 날을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물론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아무런 명분 없이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나름대로의 목적과 철학을 갖고 젊은 날의 고된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당한 도전정신’, 이들에겐 이것이 고시촌에서 버텨낼 수 있는 최고의 보약인 동시에 ‘촌훈(訓)’인 셈이다.

하지만 신문지상에 보도된 고시촌의 모습은 그리 관대하지 않다. 고시촌의 고시생과 고시실 원장 및 주변 상인들도 관대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문제를 상기시키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서로를 신뢰하지 못한 채 고시촌은 고시촌대로, 비고시촌은 비고시촌대로 삐걱거리며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 채용 인사담당자는 이 같은 고급인력들이 공부와 씨름하는 것에 대해 “사회와 직장에서 가장 바쁘게 일해야 할 30대들의 공백상태는 심각한 문제”라며 “뚜렷한 계획 없이 길게는 7~8년을 ‘공부생활’로 전전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고 질책했다.

아울러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결국 조직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워 채용 대상에서도 제외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귀뜸했다.
이런 저런 현실을 뒤집고, 꼬집고, 비틀어 봤을 때 고시촌 사람들은 막판 코너에 몰린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시촌으로 계속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대를 초월하는 ‘룸펜’ 현상
고시컨설턴트 전문가는 “20대의 경우 취업 기회가 많지만 30대는 나이 탓에 고용시장에서도 환영받지 못해 고시쪽으로 고급인력이 모이고 있다”며 “이들 늦깎이 고시생들의 양적 증가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라고 밝혔다.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환상에 젖어 사회생활과 등진 채 ‘나 홀로 공부’를 하는 30대들. 누가 이들을 사회의 변방인 고시촌으로 내몰았을까. 취업에 장기간 실패했거나, 취업을 하더라도 적응하지 못한 채 ‘인생역전’을 꿈꾸는 30대들의 몸부림. 이들의 핏속에는 1920년대 문학 동인지에서 활동했던 고급 ‘룸펜’의 피가 흐르는 것일까.

김혜남 정신분석 전문의는 이런 현상을 이른바 ‘룸펜 신드롬’으로 진단(?)했다. 김전문의는 “이들의 도전분야는 각종 고시 합격 등 ‘홀로서기’에 도전하는 경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며 “사회에서 ‘중간관리자급 리더’가 되는 시기를 놓친 채 현실감각을 잃고 ‘공부는 곧 대박’이라는 공식을 좇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른바 ‘피터팬 신드롬’이 고시생들의 직업병으로 자리잡고 있는 셈.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가치관이 한국사회에서 ‘으르렁’ 거리고 있는 한 고시촌 상주인구의 줄 대기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나이에 걸맞은 사회적 임무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점.
또한 언제나 20대 초촵중반의 마인드로 살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고시촌의 부작용은 바로 일종의 퇴행성, 고착성 장애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공생한다는 점이다.

[한경리크루트 2003-04] 박성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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