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팔도에는 아무도 알면 안 되는 문이 하나씩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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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팔도에는 아무도 알면 안 되는 문이 하나씩 있었다?
  • 한경리크루트
  • 승인 2020.09.15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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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로 읽는 5분 한국사 / 영문을 모르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네.”

여기서 영문은 감영의 문, 그러니까 예날 관청의 문 중에서 최고 관리가 드나들면 문이라고 합니다. ‘감영볼 감()’경영할 영()’을 붙여 감영(監營)’이라고 쓰는데, 2품의 높은 품계를 가진 감사가 근무하는 관청이었습니다.

평양 감사나 경상도 관찰사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죠? 감사는 나중에 관찰사라는 호칭으로 바뀌는데 당시 해당 지역을 책임지는 최고 통치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일반 행정은 물론, 지방 수령의 근무 감독이나 세금 관리, 형벌 매기기, 지역 풍속 다스리기 등 지역 전반을 관리했거든요. 군사 지휘권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감영은 군영과 병영을 겸하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당시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갇히는 곳이 감영 내의 옥사였는데 여기에서 감옥이라는 이름도 유래한 것이랍니다. 이런 관찰사는 임기가 2년으로 짧은 편이었고 상피제라는 제도에 따라 자신의 출신 지역 관찰사로는 임명될 수 없었지요.

이렇듯 지체 높은 관찰사가 드나드는 문은 일반인은 물론 하급 관리들도 함부로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경호 때문에 문이 언제 열리고 닫히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고 또 알아서도 안 됐습니다. 바로 여기서 영문을 모르다라는 말이 비롯되었답니다. 관찰사가 드나드는 감영의 문에 대해 아무도 알 수 없다는 뜻으로 말이죠.

감영은 조선 8도에 하나씩 있었는데, 경기도 감영은 서울에, 전라도 감영은 전주에, 강원도 감영은 원주에, 평안도 감영은 평양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감영에는 지역 최고의 통치자인 관찰사와 관찰사의 명에 의해 행정, 농정, 조세, 군사, 훈련, 재판, 민원 등을 처리하는 많은 인력들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또 그들의 수발을 들 수백 명의 노비들도 상주하고 있었고요. 이 모든 인원을 수용하면서 임금으로부터 부여받은 관찰사의 권위를 드러내려면 감영의 크기와 규모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가나요?

조선시대 최고의 지방 관청이었던 감영은 15세기부터 시작해 1895년 감오개혁 이전까지 유지되다가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더불어 감영지 역시 자취를 감추게 되지요. 대부분의 감영지는 현재 발굴 작업과 함께 복원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남아 있는 감영 유적으로는 원주에 있는 강원도 감영이 돌아볼 만합니다.

각 도의 행정을 맡은 관찰사는 봄과 가을이면 감영 밖으로 나와 자신이 맡은 지역을 순시하며 살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순력이라고 불렀는데, 당시 관리들에게 민생의 현장을 직접 방문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래야만 관찰사직을 원만히 수행할 수 있었고, 관찰사직에서 물러날 때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워줬거든요. 그리고 그렇게 세워진 감영 앞 선정비는 신임 관찰사에게 앞으로 잘하라는 일종의 경고였을 것입니다.

<단어로 읽는 5분 한국사>(김영훈 지음, 글담출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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