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나의 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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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나의 오아시스
  • 한경리크루트
  • 승인 2022.03.29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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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화 박사의 대중문화 칼럼 / 문화기호읽기 1
노진화 박사(밸류커뮤니케이션 대표)

인간의 손끝에서 창조된 메타버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과 닐 스티븐슨의 소설 <스노 크래시>는 메타버스를 대표하는 세계관을 구사한다. 주인공들은 소외받는 사람들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 주인공 와츠는 후미진 동네의 좁은 집에서 이모와 살고 있다. 고글로 접속한 오아시스 세상은 부와 가난의 경계에서 또 다른 삶의 형태인 곳이다. 소설 <스노 크래시>의 배경은 무정부 시대다. 주인공 히로는 메타버스에서 CIC를 위해 정보를 모으는 조사원으로 살아간다. 고글과 이어폰으로 만들어낸 가상세계는 히로가 비좁은 창고에서 살고 있다는 현실을 잊게 해준다.

메타버스에서 주인공들은 현실보다 더 멋진 모습이다. 와츠는 파티 현장에서 멋진 차와 슈트를 입고, 현실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짜릿한 감각을 VR로 체험할 수 있다. 가상세계는 나이와 성별, 종족을 뛰어넘어 현실을 넘나든다. 그곳에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 수 있고 현실에 대한 불안, 두려움, 불확실한 환경을 통제할 수 있으며, 가능하지 않은 것을 가능하게 한다. 히로의 메타버스는 늘 밤이며 화려하다. 아담한 집 한 채와 사무실, 인공지능 비서인 사서 데몬은 필요한 모든 정보를 공급해 줄 수 있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로블록스와 제페토 등은 VR/AR 디바이스와 클라우드 OS, WiFi5G를 기반으로 사회적 관계와 놀이, 비즈니스도 가능하다. 게임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실제 배우를 모션캡쳐해 인터랙티브한 세계와 안드로이드 생명체를 구현한다. 1,000개의 비선형 스토리텔링 구조는 나의 손끝에서 클릭 한 번으로 원하는 세상을 창조할 수 있다.

 

디지털 자본주의

영화와 소설에서 가상세계는 물질적 차원에서 현실보다 더 경쟁적인 자본주의 논리를 따른다. 게임 등수가 높을수록 계급이 높아지고 명예를 얻을 수 있다. 열쇠를 획득할 때마다 전광판의 순위가 바뀐다. 위협도 있다. <레디 플레이어 원> 와츠는 오아시스에서 이스터 애그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다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신분이 드러나면 현실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가진 것을 전부 잃어야 할 수도 있다.

<스노 크래시>는 디지털화된 중독체가 바이러스(메타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의 혈청을 화학적으로 처리한 것, 바이러스 혹은 마약, 종교)가 실제 인간의 뇌 세포벽을 뚫고 DNA가 저장된 세포핵까지 침투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로 해방되고 싶은 유토피아니즘적 충동은 기술 복제시대 현실보다 더 거미줄처럼 짜여있는 그로테스크함을 보여준다. 플랫폼은 거대 자본 논리로 유저들의 시간과 공간을 뭔가로 꾸준히 채워가며 시간 점유율을 획득한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출처: 넷플릭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출처: 넷플릭스)

유토피아 담론

유토피아 담론의 시작은 다가올 미래를 바로잡아 보려는 시도였다.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잉글랜드 농민들의 처참한 생활은 영국 왕조의 사회적 책임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가 제시한 유토피아는 모든 것이 공공소유인 공산사회다. 모어는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되길 바랐다. 플라톤의 그림자는 손에 닿지 못해 욕망만 일렁거리는 그 무엇, 그 너머를 알지 못하지만, 현재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신화적 상상력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정부의 정책을 비난하며 반대로 디스토피아 개념을 제시했다. 한쪽에서는 유토피아를, 또 다른 한쪽에서는 디스토피아가 만들어진다.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불행이 사라진 나라는 유토피아보다 디스토피아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유토피아의 상징적 의미는 시대적 관습을 따라 약호(code)화되고 문화적 맥락에서 담론화된다. 대상은 부재하며 남은 것은 현전하는 기표뿐이다. 인간의 본질이 존재를 탐구하고 성장이 필요한 존재라면,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져도 어느새 규칙과 체계가 가득 찬 디스토피아가 되어버리고, 또 다른 유토피아를 동경하게 될 것이다. 담론은 상상계의 영역에서 인간의 욕망과 중의성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나의 오아시스

코로나 팬데믹이 장기화되면서 번아웃 증세와 디지털 과부하 현상, 여전한 경쟁과 성공신화 속에서 현재의 삶은 행복과 멀어 보인다. 화려한 유토피아 세계는 열린 세상의 도상적 이미지와 텍스트를 남발한다. 그러나 완벽한 세상이란, 결국 불완전한 인간이 만들고 이상화시키는 것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와츠는 영화 말미, 오아시스를 물려받아 몇 가지 규칙을 정한다. 그 중 한 가지는 매주 화목요일 오아시스가 아닌 현실의 시간을 살기로 한다. 그것은 오아시스 설립자 할리데이가 부탁한 것이다. “현실은 무섭고 고통스러운 곳인 동시에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야. 왜냐면 현실은 진짜니까.”

<스노 크래시> 마지막 장면에도 히로의 동업자 와이티는 임무를 마치고 엄마를 만나서 말한다. “집으로 가?” 엄마는 , 역시 집이 제일 좋은 것 같아라고 말하며 소설이 끝난다.

판타지의 속성은 현재라는 범주를 벗어나 인물, 사건, 배경 자체를 멀리 던져버려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러나 실패와 죽음의 위협, 대단한 것을 완성하지 못해도 현실을 진지하게 살아가야 할 태도를 제시한다.

에른스트 블로흐도 유토피아에 이르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유토피아란 그 구체적인 형태 속에서 모든 것의 존재에 이르려고 하는 실험 의지. 우리가 바라는 오아시스는 막연한 미래가 아닌, 눈으로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가치(value)야 하며, 그곳에 닿으려는 의지로부터 그러한 세상에 조금씩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물질적인 표상은 결코 결말이 아름답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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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화 박사는

밸류커뮤니케이션 대표()

인하대학교 인터랙티브콘텐츠 &기호 LAB 연구원

() 한국인터넷진흥원 비즈니스 평가위원

() 한국우편사업진흥원 심사위원

() 송파구청 자문위원

realrojin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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