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하고 싶은 마음’이 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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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하고 싶은 마음’이 이깁니다
  • 이은지 기자
  • 승인 2022.05.31 13: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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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My Life | 가울 여행작가/일러스트레이터

그때 정말 좋았어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게 아닐까. ‘그때를 지나온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온기를 남기는 작가, 가울을 만났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 위치한 아담한 작업실 겸 스튜디오에 들어서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그가 경험한 순간들을 담은 그림들이 우리를 반기고, 그가 해주는 이야기 안에서 즐거움을 발견한다. 17개국 45개 도시를 여행한 여행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가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글과 그림으로 여행의 순간들을 기록하는 여행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가울이고요,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서 저의 작업을 소개하는 공간인 라잇풀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Q. 작가님의 하루 일과가 궁금합니다.

평소에 일정을 꽉 채워 분주하게 생활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라, 일부러 여유 있는 시간을 확보하려고 해요. 작업실에 나오는 날에는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책도 읽고, 스케치도 하면서 오전 시간을 보냅니다. 오전 시간을 보내고 작업실에 들어서서는 곳곳에 자리한 식물들을 돌보는 일로 오픈 준비를 시작하죠. 그리고 라잇풀스튜디오에 들러 주시는 분들께 제 그림에 담긴 이야기를 해드리는데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 나누는 걸 정말 좋아해서 그 시간을 통해 힘을 얻기도 해요. 즐거운 마음으로 친구들, 연인과 망원동을 찾아 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대화가 더 즐거워지는 것 같아요. 저녁에 스튜디오 문을 닫고 나서는, 주변에서 작업실을 운영하는 작가님들, 스튜디오를 운영하시는 사장님들과 종종 식사시간을 갖기도 해요.

 

Q. 어떤 계기로 여행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삶을 선택하신 건지 궁금해요. 작가님께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나 우연한 기회가 있었는지요?

그림과 책과 여행은 늘 좋아했어요. 그래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화가에서 디자이너로, 디자이너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명칭은 달랐지만, 늘 그림 그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처음부터 어떤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에요. 여행하기 좋은 시대에 태어났고, 여행이 잘 맞는 체질이라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죠. 다녀온 여행지들이 많아지다 보니까 나중엔 각각의 여행지가 왜 좋았는지 그 이유가 흐려지기도 하고, 섞이기도 하더라고요. 같은 여행지에 가도 각자 느끼는 게 다른데, ‘좋았다정도로 뭉뚱그려지는 게 정말 아쉽기도 했고요. 그래서 여행지에서의 순간들을 담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다녀온 여행지가 많아지면서 그림도 차곡차곡 쌓였죠. 주변 작가님들이 쌓인 그림들을 보고 페어에 나가길 권유하셨고, 처음으로 서울 일러스트레이션 페어에 참가하였어요.

그곳을 찾아 주신 분들이 제 작품에 반응하시는 걸 보고 참 많은 힘을 얻었어요. ‘그림을 그리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누군가가 나를, 내 작품을 좋아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내가 그리고 싶었던 그림을 완성한다는 관점에서 성취감을 얻을 수는 있지만, 다른 이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면 작업을 이어나가기가 정말 힘들어지거든요. 저도 그림을 그리면서 성취감은 있었지만, 내 편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페어에서 제 그림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을 보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 편은 아니지만, 분명 내 편이 되어 줄 수 있는 이들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얼마 안 됐어요. 글을 읽는 것은 오래전부터 좋아했지만, 글을 쓰는 것은 나의 세계관과 가치관과 사소한 언어습관, 어휘력까지 낱낱이 드러나는 일이라 너무 부끄러웠거든요. 많은 분들이 제가 판매하는 엽서나 포스터 뒤에 그림의 이야기가 글로 담겼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해주셨고, 덕분에 짧게나마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원래는 작업에 관심을 갖거나 구매를 하시는 분들께 말로 설명해 드렸거든요. 엽서와 포스터 뒤에 100자 내외의 글을 쓰면서 여행지에서의 이야기와 감상들이 더 잘 전달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연히 한 영화감독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분이 굉장히 진지하게 제가 책을 쓰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시더라고요. 발가벗겨지는 기분이라 쉽지 않다고 이야기하니까 그 기분을 이겨내지 못하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게 되는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책을 엮어 내보기로 결심했어요. 결심한 뒤로, 한 달에 한 번씩 레터를 발행하고 있어요. 지금은 약 90명의 구독자가 있고, 이 레터가 열두 번 발행되면 그것들을 엮어서 책을 내보자는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Q. 작가님의 은은하고 따듯한 그림들이 빛나는 기억을 담습니다라는 문장과 잘 어울려요. 작가님이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제가 프리다 칼로나 데이비드 호크니, 앤디 워홀처럼 엄청난 거장이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누군가의 거실에 제 그림이 걸려있다면, 저는 성공이에요(웃음). 그래서 누군가들과의 대화가 정말 소중해요. 저의 그림을 보고 따듯하다는 이야기를 해주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우는 분도 계셨고요. 그 분들 덕분에 나는 따듯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었어요. 저를 위해 그리기 시작한 그림이 누군가에게 감동을 준다는 사실 자체가 뭉클한 원동력이 되더라고요. 서로 감동을 주고 받으면서 작업을 이어 나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여행을 하면서 나는 앞으로, 평생 어떤 그림을 그리며 살까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좋았던 순간을 그리니까, 내가 어떤 순간을 좋아하는지 많이 생각했죠. 별을 보는 것, 꽃을 보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데, 그게 그림을 그리는 일과 비슷해요. 별을 볼 때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그림을 만나는 사람들이 반짝이는 기억을 전달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어요. 그 마음도 제가 따듯한 그림을 그리는 원동력이 되어줘요.

 

Q. ‘기억을 담는창작자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시면서 늘 마음에 새겨 두는 생각이나 인생에 있어 중요한 철학이 있나요?

저는 제가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을 굳이 그림으로 담지 않으려고 해요. 좋았던 순간의 기억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좋지 않았던 일도 기억 너머로 사라져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라질 기억들 중 지면에 담아내고 기록하는 것이 더 오래 기억되고 마음에 남아 있어요. 더 쉽게 감정을 불러일으키고요. 그래서 섣부르게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담아내지 않아요. 지나갈 것들인데, 더 오래 더 선명하게 기억하고 이 기록을 보는 이들에게 그 감정을 그대로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

우리 모두가 언젠가 한번씩은 주마등이 떠오르는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그 순간 우리가 평생 기억하려고 애썼던 것들이 떠오를 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힘들고 싫었던 순간이 떠오르는 것만큼 허망한 게 있을까요? 주마등을 경험하는 순간, 힘들었던 기억들은 모두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어줬던 계기로 추억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도 견뎠던 시간들 덕분에 세계여행을 할 수 있었고, 여행작가가 될 수 있었으니까요. 언제부턴가 원치 않는 일이 닥쳤을 때도 네가 내 하루를 망치고 싶다고? 절대로 그럴 수 없지!’라는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Q. 인스타그램을 통해 최근 책을 내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요. 책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나요?

장마가 심했던 몇 해 전 여름에 하던 작업들을 엮은 소책자인데요, ‘디어리틀플라워라는 제목입니다. 당시에 비도 많이 내리고, 회사에 들어가 적응하기 위해 애쓰던 시기라 조금 지친 상태였어요. 길을 걷다 우연히 빗속에 피어 있는 작은 꽃 한 송이를 발견했어요. 비가 세차게 퍼붓던 날이라 여린 꽃대가 꺾일 만도 한데 꿋꿋이 버텨내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면서 위로를 받았어요.

저는 사람이 없는 그림을 잘 그리지 않았는데, 그날 이후로 작은 꽃들을 찾아 다녔어요. 꽃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거죠. 비오는 날 위로가 되어줬던 작은 꽃이 누군가에게 또 큰 위로가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했어요. 꺾일 것 같지만 꺾이지 않는 힘을 가진 우리를 떠올리기도 했고요. 글 없이 작은 꽃 그림만 엮어낸 아주 소박한 책이고, 지금은 작업실에서 판매하고 있어요.

 

Q. 앞으로 어떤 작업을 계획하고 있는지, 또 훗날 기회가 된다면 하고픈 일이 있는지 들려주세요.

작업한 그림과 글을 엮어 책을 만드는 일에 집중하려고 해요. 책에 담길 이야기들을 뉴스레터로 발행하는 데 많은 시간을 쓸 것 같아요. 여행하면서 작업한 스케치들을 엮은 책도 펴내고 싶고요. 팬데믹 상황도 많이 정리되고 있으니 그동안 하지 못했던 여행도 다니고 싶어요.

Q. 소소하지만 확실하게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작가님만의 순간이 있다면 언제인가요?

20대 때부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일상들을 차곡차곡 모아왔어요. 이런 순간들이 저 스스로를 돌보게 하니까요. 한강에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자전거 라이딩하는 일, 식물들이 새순을 틔우고 조금씩 생기는 작은 변화를 눈치채는 일, 짬을 내서 커피가 맛난 카페에 가는 일, 가족의 부탁을 기꺼운 마음으로 들어주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일, 친구와 좋아하는 차를 마시며 대화하는 일, 와인과 치즈를 맛있게 먹는 일, 우쿨렐레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일,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일떠올려보니, 행복이 깃드는 일상들이 셀 수 없이 많네요.

네팔을 여행하면서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것도 사람이고,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참 많이 느꼈어요. 그래서 제 주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많이 챙기려고 해요. 제가 행복을 줄 수 있는 방법이자, 제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인 것 같아서요. 요즘에는 최근 태어난 조카가 가장 확실하고 커다란 행복이 되어주고 있습니다(웃음).

 

Q. 마지막으로 이야기가 깃든 순간들을 담은 그림이나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 창작자들을 향한 응원의 말이나 조언 부탁드립니다.

결국 하고 싶은 마음이 이기는 것 같아요. 여기서 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은 흥미를 갖는 정도의 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지금은 가족들도 제가 그림을 그리고 글 쓰는 일을 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치지 않는 반대에 부딪힐 때, 끝 모르는 불안에 마음이 서늘해질 때, 하고 싶은 마음이 이겼던 것 같아요. 누구도 확신을 주지 않을 때 하고 싶은 마음은 제가 여행을 선택하게 했고, 그 순간을 그리게 했고, 그림을 매개로 많은 이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했어요. 잘 지켜낸 마음으로 버텨온 시간이 저의 가치를 만들어 준 것 같아요. 물론, 아무것도 안 하고 버티기만 한 건 아니에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꾸준히 해내면서 버티는 거죠.

하고 싶은 일이 있는 사람들에게 버티는 시간으로 테스트를 해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기간 동안 내가 뭘 하고 있는가, 아무것도 보장되거나 확신할 수 없어도 그 일을 계속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세요. 그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게 확인이 되면 버티세요. 시간만큼 정직하고 잔인한 게 없잖아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버티다 보면, 손잡이조차 보이지 않았던 문이 열리는 순간이 올 거예요. ‘라는 사람이 쌓아온 시간이 를 만드는 것이고, 그 시간에 책임을 지는 것이 삶이니까요. 하고 싶은 일이 없는 이들은 어떤 방법으로도 도울 수 없지만, 간절히 하고 싶은 것이 있는 이들은 결국 자신이 그리던 날을 만나게 되더라고요.

/ 이은지 기자 leeeunji_0220@hanmail.net

사진 / 가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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