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가 산으로 간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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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가 산으로 간 까닭은?
  • 한경리크루트
  • 승인 2022.07.2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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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화 박사의 대중문화 칼럼 / 문화기호읽기 5
노진화 박사(밸류커뮤니케이션 대표)

니체의 1883년 걸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참된 정신과 자기를 찾기 위해 고독 속으로 들어간 한 인간의 이야기다. 그는 산속 동굴에서 10년간 은둔자의 삶을 살았다. 산에서 만나는 번개는 검은 구름이 끼고 빗방울이 떨어지고 나서야 이윽고 번쩍였다. 차라투스트라에게 번개는 모든 지혜의 과정이자 깨달음이었다.

어느 날 그는 인간들이 있는 세상으로 내려가 초인(위버맨쉬)과 영원회귀에 대한 깨달음을 전파하기로 한다. 초인이란, 끝없이 새로운 관점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자 광기, 대지이며 극복되어야 할 존재다. 영원회귀란, 인간이 만물과 영원한 횟수에 걸쳐 이미 존재한다는 사상이다. 인간의 삶이 과거의 회환, 영원히 반복되는 인생이라면 모든 순간에 최고의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은 운명을 사랑하는 것, 승화시킬 수 있는 삶의 태도, 아모르 파티(amor fati).

그러나 시장의 인간들은 쾌락과 악의로 허우적거리느라 차라투스트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차라투스트라는 마치 왕처럼, 예언자처럼 걷고 또 걸으며 보이는 관념의 세계와 보이지 않는 영혼의 세계를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설파했다.

백발이 된 어느 날, 마침내 위대한 사람들을 발견하는가 싶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그들은 타고 다니던 나귀를 이라며 찬양하고 있었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를 향해 고약한 풋내기 신자!”라고 독설을 쏟아냈다.

차라투스트라는 무릎을 쳤다. 극복하는 자만이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해 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를 넘어서야 새로운 인간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니체도 신이 죽었다고 말했다. 장자는 <소요유>에서 자기살해(자기 자신을 장례 지낸다) 없이는 완전한 정신적 자유가 없다고 말했다. 먼저 각성한 자들의 생각이다.

그리스 파르나소스산(출처: 노진화)
그리스 파르나소스산(출처: 노진화)

차라투스트라가 산으로 간 까닭은

차라투스트라에게 산은 곧 고독과 마주하는 장소였다. 고독은 지금보다 더 나아지겠다는 적극적 사유 활동이다. 고독은 자기 안에 감추어진 보물을 보게 한다. 그러나 보물은 중력의 영 때문에 맨 나중에 꺼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보물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타인에 의존할 필요도 적다고 생각했다. 보물은 바로 스스로 강해지고 풍요로워지는 원천, 고독의 상급이었다.

차라투스트라가 세상으로 내려가는 때는 가르침이 왜곡되거나, 그의 깨달음이 위기에 빠져있을 때였다. 시장은 그에게 상처를 주지만, 때론 의사가 되기도 했다. 타인과 관계 속에서 상처받고 나면, 삶의 문제에 더 가까워지고, 간절히 고독의 시간을 원했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시장 사람들에게 자기가 사랑한 그 고독을 예찬했다.

요란한 소음에 시달리거나, 소인배들의 가시에 찔린다면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시장은 성대하게 차려입은 어릿광대들로 가득하다. 독파리 떼는 아무 생각도 없이 영혼의 피를 요구한다. 고독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자기 세계를 창조할 수 없다.”

차라투스트라는 고독 속에서 자기를 찾고, 씨를 뿌린 농부처럼 점점 지혜가 성장하고, 무르익으며 충만해진다고 믿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차라투스트라의 동굴로 초대받고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인지, 않은 것인지 고독의 동굴로 들어가지 못했다.

 

디오니소스적인 삶

니체는 인간 삶에 두 신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다. 아폴론은 이성적 균형미를 갖춘 모습이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인간 세멜라의 몸에서 두 번 태어난 인간, 지상과 지옥을 넘나드는 인간으로 이성과 광기의 경계를 넘는 모습이다. 디오니소스는 가는 곳마다 포도나무 재배와 양조법을 가르치고, 포도주를 마시며 축제를 즐겼다. 니체는 삶 자체를 디오니소스 축제라고 표현했다.

니체는 당 시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쇼펜하우어와 칸트 철학, 니힐리즘(허무주의), 그리스도교의 모순에서 벗어나는 길은 디오니소스가 유일하다고 생각했다. 디오니소스처럼 아무리 어려운 일도 마치 축제를 지냈던 것처럼 대범하게 받아들이고, 불멸의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하는 것, 내적 역동의 주인공이다. 자크 데리다는 니체의 영혼회귀 공간은 어떤 권위도 없는 수많은 해석 놀이의 공간이라고 말했다. 차라투스트라에게 놀이는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이며, 웃음은 신성한 그 무엇이었다.

한 번이라도 춤추지 않았던 날은 잃어버린 날이기를. 그리고 한 번 커다란 웃음을 선사하지 못했던 진리는 모두 거짓이기를사라져라. 하지만 되돌아오리! 모든 쾌락은 영원을 원한다차원 높은 인간들이여 배우라. 웃는 것을!”(4)

 

차라투스트라의 말과 언어

차라투스트라는 진리를 말하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인간에게 그의 말은 그 자체일 뿐이었다. 말은 순간 들렀다가 순간 사라져버린다. 진리가 아닌 것이 언어를 과도하게 점령하게 되면, 진리를 보유하는 능력이 상실된다.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지 못해 더 이상 현존할 수 없다.

구약성서 시대에는 그것을 선험성으로 붙잡아두려고 했다. 신의 음성은 선험성의 흔적이었기 때문에 말은 곧 진리였다. 니체의 말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는 신이 죽은 시대에 살고 있다. 신이 살아있다면 창조의 영역은 신만이 할 수 있다. 인간이 창조자가 되려면 신은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 인간 창조자는 고통가운데 기쁨을 맛볼 수 있다.”

만약 이것이 그럴듯한 가설이라면, 언어학자 막스 피카르트가 <인간과 말>에서 언급한 신이 떠난 말은 부유하는 인공적 단어일 뿐이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그래서 오늘날 인간은 언어의 관념을 진리와 도덕의 기준으로 삼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 “더 바람직한 것은 차라투스트라의 존재를 부끄러워하는 일이다. 나를 버리고 자신을 찾도록 해라.”

신도 죽었고, 니체도 죽었다. 이제 차라투스트라도 죽어야 할 차례다. 그가 살아있다면 창조의 영역은 그만이 할 수 있다. 우리는 창조자가 되었다. 나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 어쩌면 지성이라는 것도 신의 죽음차라투스트라의 죽음인간()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영원회귀의 순환성과 닮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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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화 박사는…

인터랙티브콘텐츠 박사

밸류커뮤니케이션 대표(現)

인하대학교 인터랙티브콘텐츠 &인지기호 LAB 연구원

(전) 한국인터넷진흥원 비즈니스 평가위원

(전) 한국우편사업진흥원 심사위원

(전) 송파구청 자문위원

realrojin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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