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에 올라가면 사다리를 치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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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에 올라가면 사다리를 치워야 한다
  • 한경리크루트
  • 승인 2022.08.29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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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화 박사의 대중문화 칼럼 / 문화기호읽기 6
노진화 박사(밸류커뮤니케이션 대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1980)은 이탈리아 북부 어느 수도원을 배경으로 하는 추리소설이자 종교, 역사소설이다. 소설의 시작은 1327년 윌리엄의 제자 아드송의 수기가 발견되면서부터다. 그는 윌리엄 신부와 함께 살인사건 해결과 종교적 갈등을 빚었던 교황과 황제 간 화해를 주선하기 위해 수도원으로 가게 된다.

첫째, 살인사건은 요한묵시록의 예언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범인은 수도사 호르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을 숨기기 위해 책에 독약을 바른 것이었다. <시학 2>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소설 속에서는 중요한 서책이다. 책에서 웃음은 스스로 우월해져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도 있는 위험한 것이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감추고, 누군가는 그것을 찾아내고자 한다.

둘째, 교황과 프란체스코 및 황제파는 물질과 소유에 대한 청빈, 권력에 대해 논쟁을 한다. 기독교의 정통성은 니케아 공의회가 삼위일체를 인정한 이후 부패와 타락, 정치 권력과 팽팽한 갈등을 겪어왔다. 이들은 예수에게 재산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주장이 맞섰다. 그러나 수도원에 큰불이 나면서 장서관도, 사람들도 언어도, 진리도 모두 사라지고 만다.

<장미의 이름>은 결말이 없다. 에코는 작품이 끝나면 작가가 죽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열린 해석을 권하고 있다. 텍스트는 의미가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에코는 소설 속의 수많은 진리의 담론을 뒤로 하고 그 시대의 수도자들만이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끝을 맺는다.

메테오라 수도원(출처: 노진화)

중세시대 웃음은 왜 금기가 되었는가

14세기 주된 담론은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과 아우구스투스의 고백록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초월적 신에게 모든 것을 의지했고, 신앙과 이성의 능력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이때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비판하고 사물의 본질과 논리를 주장하여 중세철학 및 과학 분야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만약, 아리스토텔레스의 숨겨진 책이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당시의 종교적 가치체계를 흔들고 권위를 무너트릴 수도 있는 것이었.

소설에만 존재하는 <시학 2>에서 웃음은 우월성과 계몽성을 가졌다. 우리는 우리보다 더 비천한 사람을 보며 웃는다. 웃음의 대상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지는 것, 기형적인 것, 하찮은 것에 대한 표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곧 웃음이다.” 또한 웃음은 마음이 열리는 세상의 문, 철학이나 부정한 신학의 대상, 웃음만이 이성과 감성을 구출할 수 있다고 쓰여 있다.

호르헤는 웃음이 경건치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거룩한 곳에서 소란케 하는 희롱과 잡담과 웃음은 종교적으로 금해야 할 것이었다. 진리와 선행은 웃음의 대상이 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결국 장서관이 불바다가 되던 날, 호르헤는 서책과 함께 뜨거운 불속으로 뛰어들고 만다.
웃음에 대한 재해석은 18세기 이후, 그리고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끊임없는 주제가 되었다. 오늘날 웃음은 건강한 사회의 척도이다.

 

<장미의 이름>에서 진리란 무엇인가

첫 문장은 작가의 의도를 정박하는 기능을 한다. 프롤로그는 이렇게 시작한다. 요한복음 1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나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여기서 말씀(성자)과 하나님(성부)은 똑같은 분이 아니라 동일 본질이다(유대인과 무슬림에게 하나님은 야훼한 분이다).

소설은 에게서 진리를 찾고 있다. 웃음과 청빈, 이단에 대한 논쟁에서도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이다. 하지만 이들은 진리라는 이름으로, 천상의 권력과 지상의 권력을 나누기에 바빴다. 정통에 따르지 않는 자들을 법정에 세웠으며,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단들은 이전의 고통스러운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찾아갔을 뿐이다. 진리라고 해서 모두에게 유익한 것도 아니었다.

시대가 지나면서 진리에 대한 개념이 바뀌고 있다. 수많은 종파가 생겨나고, 서로 옳고 그름을 주장한다. 진리를 말하는 것은 상황이 복합해질수록 책임과 어려움이 따른다.

최근 가톨릭 교회는 종교재판의 심포지움을 열고 교정 가능한 양심을 찾고 있다. 지난 7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캐나다를 방문해 악행을 저지른 것에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다. 과거의 잘못된 것들을 기억하고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복잡한 미궁 속에서 질서 있게 뻗어져 나가는 리좀, 진리의 실천적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단순한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통상적인 추론에 대한 올바른 판단과 보편적이고도 진지한 숙고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나친 믿음을 경계해야 한다.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저와 함께 죽거나 저 대신 죽게 하기 때문이다.

 

지붕에 올라가면 사다리를 치워야 하는 이유

움베르토 에코는 독자들의 읽기를 배려하며 <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를 출간했다. 그는 독자들이 소설을 통해 자기의 삶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이해하길 바랐다. 오늘날에는 진리가 보이기 어렵다. 혼돈시대에는 자기 철학과 진리를 추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높은 데 이르면사다리를 버려야 한다. 쓸모 있기는 했지만 그 자체에는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되니 말이다유용한 진리라고 하는 것은 언젠가 버려야 할 연장과 같은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지붕과 사다리의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명제를 위해서, 자신의 명제를 딛고 서는 것이다. 그래야 그 세계를 바로 볼 수 있다.” 새로운 진리를 깨달으면 이전의 진리는 무의미하다. 진리를 얻고 난 후에는 언젠가 버려질 진리에 대해 집착을 버려야 한다. 여기서 사다리는 지성과 영성의 역할이지 오르내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으로 내려가지 말며 집에서 물건을 가져가러 들어가지 말지니라( 13:1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후 소금기둥이 되었다. 오르페우스는 지옥에서 에우리디케를 뒤돌아봄으로써 죽은 후에야 만날 수 있었다.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은 자신의 명제를 위해 돌아보지 말고 나아가야 한다.

내 지붕 위에 있는 진리의 명제는 무엇인가. 상상의 질서는 어떤 체계를 가지고 있는가. 사다리는 튼튼한가. 올라갈 힘과 의지가 있는가. 지붕을 사모하는가. 언젠가 버려질 것들에 대해 미련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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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화 박사는…

인터랙티브콘텐츠 박사

밸류커뮤니케이션 대표(現)

인하대학교 인터랙티브콘텐츠 &인지기호 LAB 연구원

(전) 한국인터넷진흥원 비즈니스 평가위원

(전) 한국우편사업진흥원 심사위원

(전) 송파구청 자문위원

realrojin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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