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유를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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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유를 갈망한다
  • 한경리크루트
  • 승인 2022.12.30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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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화 박사의 대중문화 칼럼 / 문화기호읽기 10
노진화 박사(밸류커뮤니케이션 대표)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그리스인 조르바(1946)> 주인공 나(보스)는 붓다를 동경하며 이상적 삶을 꿈꾸어 왔다. 하지만 조국의 독립과 격동의 시기, 삶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나의 영혼아, 너는 지금까지는 그림자를 보고 만족했지만, 이제 나는 살아 있는 육신을 찾아 나설 거야.”

크레타로 가는 길, 피레에프스 항구에서 낯선 사내를 알게 된다. 보스가 오랫동안 찾아다닌 인간, 조르바였다. 조르바는 알렉산더 대왕이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풀 듯,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찾아다니는 동물적 존재였다. 자기 내부로부터의 해방, 우상들로부터의 해방,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았지만, 어느 것에도 속박되지 않았고 집착하지도 않는 인간이었다.

보스와 조르바는 갈탄 사업을 시작했다. 조르바는 일을 마치면 마담 오르탕스를 찾아갔다. 그에게 사랑은 쾌락이 아니라 육체적이고 적극적인 감각의 삶이다. 보스는 과부를 찾아갔다. 그날 밤 그는 생전 처음으로 영혼이 육체이고 육체가 영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스는 조르바와의 대화를 통해 점점 가슴을 넓혀가고 영혼의 안식을 위로받는다. 복잡한 근심 걱정을 단칼에 자르듯 해결하고, 조르바의 정확한 직감으로 지름길을 인도받는다.

어느 날 오르탕스 부인은 병으로 죽고 과부도 죽임을 당한다. 수도원은 불타고 갈탄 사업도 망했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보스는 조르바에게 춤을 가르쳐 달라고 한다.

춤이라고 했어요? 정말 춤이라고 했소?” 보스에게 춤은 조르바의 언어다. 도전, 백절불굴, 저항 그 자체다. 이윽고 보스도 최후의 인간 붓다를 넘어 진짜 자신을 만났다. 마치 태초의 자연인처럼.

마이클 카코야니스 감독의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

보스가 조르바를 좋아하는 이유

보스는 항상 머리가 앞섰다. “언제쯤이면 그 언제쯤이면, 과연 언제쯤이면. 고민하던 것을 꿈이라고 확신하며 사막에 들어설 수 있을까.”

내면의 무서운 악마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신곡>을 읽으며 천당과 지옥과 연옥을 상상했다.

조르바는 모든 신념과 환상에서 해방되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기 의지대로 살지 않으면 노예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면 기대할 것도, 잃을 것도 없다. 존재 현실이 괴로운 것은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비워라! 비워라! 조르바는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신물이 날 때까지 먹고 먹었다. 욕망을 벗어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조르바도 두려움이 있었다. 늙는다는 것과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두려움은 보이지 않는 것, 사라지는 것, 소멸하는 것들에서 온다. 두려움은 두려움을 과장하고 실패의 경험으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조르바는 두려울수록 세상을 자기 의지대로 야수처럼 잡아 삼키려 했다.

조르바에게 자기 의지대로 사는 삶이란 이런 것이다. “육체란, 짐을 진 짐승과 같아요. 육체를 먹이지 않으면 언젠가는 길바닥에다 영혼을 팽개치고 말 거라고요. 오늘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마쇼. 세상은 단순해요.”

욕망에서 자유로워짐으로써 자기 삶을 온전히 지배했다. 보스는 조르바를 학교라고 불렀다.

 

자유란, 자신을 묶는 로프를 잘라내는 것

조르바가 보스에게 말했다. “당신은 한 가지만 빼고 다 갖췄어요. 광기! 사람이라면 약간의 광기가 필요해요. 그렇지 않으면 감히 자신을 묶는 로프를 잘라내서 자유로워질 엄두를 내지 못해요. 모든 걸 다 걸어야 해요! 당신의 고귀한 줄은 깁니다. 그러려면 바보가 되어야 해요.”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로프에 매달려 있다. 한 번도 그것이 왜 있는 것인지 의심해보지 않았다. 자유하고 싶다면, 고귀한 긴 줄을 잘라야 한다. 보스는 남들의 시선 때문에, 남들이 꿈이라고 믿게 만든 것들 때문에 로프를 끊어내지 못했다.

자유하려면, 관념에 존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도덕적 해방, 아우구스투스의 선택의 자유, 토마스 아퀴나스의 선에의 능력, 하느님 앞에서 짊어져야 하는 영원성의 무게를 모두 버려야 한다. “붓다, 하느님, 조국, 이상 이 모든 허깨비들로부터 도망쳐야해. 내 영혼에는 절대 들어오지 못해. 문을 열어 주지 않을 테니까.”

자유의지에 의해 선택된 삶은 더 이상 관념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지 않을 수 있다. 버리고 나서야 무엇이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원점으로 돌아가더라도 이전의 원점이 아닐 것이다.

 

내가 보스를 좋아하는 이유

보스와 조르바는 대립적 존재이다. 조르바는 경험하는 인간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바대로 거침없이 행동한다. 그는 산투스 하나만 있어도 충분했다. 그는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인간이자 십자가 고통을 겪은 그리스도 같았다. 반면 보스는 관습과 전통의 틀,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운다. 주머니에는 책 한 권, 종이 몇 장이 들어있다.

나는 보스를 닮았다. 책으로 세상을 경험하고도 마치 모든 것을 아는 척하고, 허깨비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지만 도망치지 못하고, 성공 관념으로 로프를 끊어버리지도 못하고, 선택의 자유가 있어도 선뜻 용기내지 못했다.

조르바가 떠난 후, 보스는 가끔 내면의 조르바와 대화를 했다. ‘자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조르바가 물어왔다. 보스는 점점 위험한 인간, 육체적 인간으로 변해갔다. 고통을 통해 자기다워졌고, 선택의 자유를 통해 종속에서 벗어났다. ‘조르바라는 성인의 전기가 완성되던 어느 날, 편지 한 통을 받는다. 조르바의 부고 소식이었다.

내가 조르바의 부고편지에 눈물을 글썽였던 것은 보스가 조르바를 좋아했던 만큼, 나도 조르바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내 안에 초인간적인 갈망, 꿈틀대는 욕망이 엄습할 때면 조르바를 떠올려 본다.

그가 묻는다. “진화, 지금 뭐 하고 있어?” 이 질문이 나를 존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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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화 박사는…

인터랙티브콘텐츠 박사

밸류커뮤니케이션 대표(現)

인하대학교 인터랙티브콘텐츠 &인지기호 LAB 연구원

(전) 한국인터넷진흥원 비즈니스 평가위원

(전) 한국우편사업진흥원 심사위원

(전) 송파구청 자문위원

realrojin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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