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투스의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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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투스의 배신
  • 한경리크루트
  • 승인 2023.07.27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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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화 박사의 대중문화 칼럼 Ver.2 | 문화기호읽기 5
노진화 박사(인터랙티브콘텐츠 박사)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5-6), 1996>는 카이사르의 성장기에서부터 로마 영토를 넓히고 개혁하는 리더십과 정치적 갈등, 암살 이후 옥타비아누스에 의한 로마 제국의 설립을 다루고 있다.

카이사르(BC 100-BC 44)는 로마 역사상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정치 영역에서 게르만의 문제를 해결하고, 갈리아 전쟁과 연이은 공방전에서 승리하여 로마 영토를 확장했다.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부 인프라 및 공공사업을 개선하고 토지 분배 및 달력 개혁과 같은 개혁을 도입했다. 속주국들에게 시민권을 확대하고 문학과 철학도 지원했다.

카이사르는 스캔들과 사치꾼, 폭군으로도 유명했다. 이집트 클레오파트라뿐 아니라 여러 여성을 사랑했으며, 유흥으로 낭비벽이 심했다. 켈트족은 갈리아 전투에서 그를 잔인하고 무자비한 폭군으로 여겼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은 그를 존경했다. 그의 명성이 점점 높아지자,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경계하고 불만을 품었다.

기원전 44 3 15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극장에서 암살자들로부터 스물세 번의 자상을 입고 쓰러졌다셰익스피어 <줄리어스 시저>에서 카이사르가 남긴 마지막 말은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라고 전해진다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카이사르는 타고난 재능[중략]그러나 아집과 야망이라는 용서받을  없는 악덕에 사로 잡혀끝내는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빈첸초 카무치니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 1805>
<출처: https://artuk.org/discover/artworks/the-death-of-julius-caesar-83483>

영웅의 조건

일반적으로 영웅은 도전적이거나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탁월한 용기와 능력을 갖추고 있다. 카이사르는 로마 부유한 귀족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부모는 정치적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

당시 로마는 공화정 말기로 귀족파와 민중파가 대결하는 혼란의 시기였다. 술라가 이끄는 귀족파는 특권적 지위를 중시했다. 반면, 마리우스가 이끄는 민중파는 평민의 권리와 대표성을 옹호했다. 파벌싸움에서 진 마리우스파는 술라에게 대부분 숙청당하고 말았다.

카이사르는 마리우스파에 속했다. 그는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을 발전시켜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술라의 사망 후, 그는 야망을 적극 드러내기 시작한다. 외부적으로 갈리아 지역에서 파르나케스 2세를 이겼다. 이때의 명언이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이다. 그는 내부적으로는 소수의 귀족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또한 카이사르는 평생 동안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게 살고자 했다. 술라가 반대파를 숙청하는 전략을 사용했다면, 그는 공화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모두 용서했다. 롤 모델은 알렉산더 대왕이었다.

그러나 그의 행보에는 걸림돌이 많았다. 정치 이념은 사사건건 원로원 계급의 보수적 가치관과 충돌했다. 원로원은 그를 로마 공화국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 키케로는 그가 국가적 혁명을 주도. 로마의 헌법을 무너트릴 수 있는 사람이다고 말했다.

 

카이사르의 야망

카이사르의 본격적인 행보는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시작한 삼두정치였다. 크라수스는 자금을 투자하고 폼페이우스는 옛 군사들을 동원했으며, 카이사르는 집정관이 되어 폼페이우스의 오리엔트 재편성안을 승인하고자 했다. 카이사르의 권력이 커지면서 삼두정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49,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명령했다. “그대에게 국가의 방패가 되어 카이사르를 향해 진군할 것을 명령하오.” 원로원의 최종 권고를 알게 된 카이사르는 루비콘강을 건너고 말았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루비콘강을 건너는 것은 로마에 충성한다는 서약과 전통과 법규를 무시한 반역이었다. 카이사르는 진격하여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로마의 종신 독재관으로 취임했다.

기원전 44, 카이사르가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아첨꾼 발부스와 안토니우스는 윗사람으로 예우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카이사르를 지켜보던 키케로가 말했다. “나는 카이사르가 어떤 정치를 하려는지 알 수가 없네.” 로마 시민들은 왕정 시대를 지나오며 군주제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었다. 상원의원 브루투스도 폭군 밑에서 참고 견디어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했다.

 

브루투스는 배신자인가, 애국자인가?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측근이었다. 그의 어머니 세르빌리아는 카이사르와 연인 관계였으므로, 카이사르에게는 아들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카이사르에게 반대하여 로마의 가치체계를 보전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했다.

카시우스는 가짜 편지로 분노를 부추겼다. “부르투스여 그대는 잠자고 있는가?” 니체는 브루투스의 암살 가담을 권력에 대한 의지라고 평가했다. 이는 브루투스가 자신의 이상을 주장하고 로마 정치권 내에서 권력을 얻고자 한 욕망이라는 것이다.

카이사르가 죽고 난 후 유언장이 공개되자, 분노한 시민들은 배신자들을 향해 횃불을 들었다. 암살 주도자와 그의 가족들은 추방과 박해를 당하거나 일부는 처형되었다. 부르투스와 카시우스는 기원전 42년 카이사르의 후계자였던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에게 저항하다가 필리피 전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로마는 브루투스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공화국이 막을 내리고, 로마제국이 세워졌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공화정 말기 시대와 다르지 않다. 양극화와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적 분열은 서로 다른 문화적 이데올로기, 사회경제적 격차 속에서 불신의 씨앗은 분노를 낳고, 사회적 결속력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서로 다른 이념이 국가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 포퓰리즘 대결 구도는 너무나 스펙타클해서 배신의 연속이다. 그러나 역사의 과정에서 동맹이나 체제의 실패가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금은 실패해도 나중에는 대안을 제시해 온 또 다른 체제가 있어 왔기 때문이다.

만약, 브루투스가 카이사르와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함께 나아갔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을까? 이상과 상상은 언제나 만족할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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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화 박사는…

인터랙티브콘텐츠 박사

세계문화기호연구원 원장

인하대학교 인터랙티브콘텐츠&인지기호 LAB 연구원

상지대학교 경영학과 강사

(전) 한국인터넷진흥원 비즈니스 평가위원

(전) 한국우편사업진흥원 심사위원

(전) 송파구청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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