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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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우정
  • 한경 리크루트
  • 승인 2024.01.26 13: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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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화 박사의 대중문화 칼럼 Ver.2 | 문화기호읽기 11
노진화 박사(인터랙티브콘텐츠 박사)
노진화 박사(인터랙티브콘텐츠 박사)

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1930>는 중세 시대 마리아브론 수도원에서 만난 두 친구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르치스는 어릴 때부터 수도사의 길을 택하여 학문을 겸비한 영적 안내자가 되고 싶었다. 골드문트는 몽상가로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에 의해 수도원에 보내졌으며, 뛰어난 지성을 가진 나르치스를 스승으로 따랐다. 둘은 서로의 잃어버린 반쪽, 순수한 영적 우정을 키워 나갔다.

나르치스가 골드문트에게 말했다.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갈망이 꿈틀대고 있지……. 스스로 너 자신을 발견하기만 한다면, 나보다 우월해 질거야.”

그날 밤 골드문트는 크게 아팠다. 병의 원인은 무희였던, 기억에 희미한 ‘어머니’에 대한 갈망이었다.

며칠 후, 그는 마음이 유혹하는 소리를 따라 수도원을 떠났다. 바깥 세계는 여인들과 사랑도 마음껏 나눌 수 있었지만, 매 순간 두려움에 맞서야 했다. 그는 사람을 죽였고, 도둑질과 간음, 불륜으로 인해 신 앞에서 떳떳하지 못했다. 그때마다 마음속에 나르치스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골드문트가 대답했다.

“세상은 온통 죽음뿐이야!”

그는 성모 마리아상을 보고 자신의 예술적 기질을 발견한다. 늙고 병들어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온 골드문트는 자신의 삶을 나르치스에게 들려준다. 그리고 마지막 걸작, 복음을 전하는 인물들을 완성한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삶에서 그의 대등한 가치, 창조성을 칭찬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가 자신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정에 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정에 대해 “다른 좋은 것을 가졌더라도 친구가 없는 삶을 살기를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필요할 때 서로 보살펴주고 위약함으로 인해 잘못하는 행동들을 보완하도록 도와준다”고 말했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와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다. 이들의 우정이 늘 거듭 새로워져서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길 바랐다. 그러나 골드문트는 목표가 없었다.

“떠오르는 어머니 상에게 물어보고 귀를 기울여봐.”

융의 이론에 따르면, 한 사람에게는 애니무스(Animus:남성성)와 아니마(Anima:여성성)라는 두 가지 모습이 공존한다. 나르치스가 과학과 논리, 신과 ‘남성 의식’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골드문트는 자연과 ‘여성 의식’을 상징한다. 인간의 삶은 두 가지가 서로 뒤섞일 때에만 무미건조한 양자택일로 인해 삶이 분열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골드문트가 죽어가던 순간 나르치스에게 말했다.

“내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면 그건 자네 덕분일세. 학창시절에는 자네처럼 지성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네.”

그는 어머니 이야기를 줄곧 하다가 나르치스에게 눈으로 이생의 작별을 고했다. 이들은 마지막을 함께했다.

 

골드문트에게 어머니라는 존재란?

어머니는 보호자이자 양육자이다. 아이들이 자랄 때 정서적,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아이에게 ‘타자’로서 거울 세계를 보여주며 자아감과 정체성을 발달시킨다. 그러나 골드문트에게 어머니는 기억에 없는 존재였다.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의 모습을 유추해 볼 뿐이었다. 그가 수도원을 떠난 이유는 어머니라는 모성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중요한 문제였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 덕분에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점점 더 깨닫게 되고, 그는 본능의 원형인, Urmutter(원시 어머니)에게 돌아가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골드문트는 세상에서 만난 여성들에게 자신의 이상과 욕망을 투영하여 ‘여자’를 어머니로 해석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어머니의 원형을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를 찾지 못해 영원히 불완전한 존재로 남을 것이라는 두려움은, 많은 여성의 탐닉으로 이어졌다.

그는 수많은 죽음의 현장을 경험하며 죽음과 원초적인 에로티시즘은 쾌락적 본질이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지각하는 행동, 혹은 의식 활동이었다. 골드문트는 죽어서 마침내 어머니에게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어머니의 정신적인 표상은 가장 성스러운 형상, 성모 마리아였다.

 

골드문트의 예술과 승화

골드문트는 자신의 영적 열망과 어머니의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예술은 그에게 두려움을 맛본한 인간의 느낌이었다. 그를 단련시킨 것은 사랑이었다.

예술가 니클라우스는 그에게 예술가가 될 수 있도록 돕는다.

“젊은이 자네는 예술에 대해 그리고 쾌감과 고통에 대해 훌륭하게 말할 줄 알고 있네. 어디 한번 그림을 그려보게나.”

골드문트가 인생 최고의 행복을 느낀 때는 수도원에서 작품을 만들 때였다. 그의 작품이 수도원에서 공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공허했다. 과연 그런 희생을 치를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었는지 의심했다. 그것은 인간 본성의 찰나적인 아름다움과 비극적인 무상함이었다. 그의 작품들은 단순히 미학적 가치를 지닌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과 세상에서 그의 위치를 이해하는 단계이자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 삶과 죽음, 사랑과 상실, 영성과 육욕의 이중성을 담아낸 것이다.
헤세는 소설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처럼 골드문트의 비극적 삶을 통해 예술이 어떻게 자아실현의 과정이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육신적 존재가 끝없이 무의미한 죽음의 춤판을 벌이는 와중에서도 창조적 정신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토한 셈일세.”

만약, 그 와중에도 창조적 정신이 존재한다면, 우리 삶도 정신적인 표상을 쫓아 예술로 승화할 여지가 남아있다. 그러나 골드문트가 후회하는 것처럼, 예술을 창작하면서 인생을 그 대가로 지불하지 말아야 한다. 인생을 즐기면서도 숭고한 창조정신은 단념하지 말아아 한다!

 


 

노진화 박사는...

• 인터랙티브콘텐츠 박사

• 세계문화기호연구원 원장

• 인하대학교 인터랙티브콘텐츠&인지기호 LAB 연구원
• 상지대학교 경영학과 강사

• (전) 한국인터넷진흥원 비즈니스 평가위원

• (전) 한국우편사업진흥원 심사위원

• (전) 송파구청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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